우리학교 시리즈
발생기의 우리학교 Vol. 51 규슈 중고급학교 가야금병창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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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기의 우리학교 Vol. 51 규슈 중고급학교 가야금병창부 (글 황리애)
시모노세키에서 규슈로 이어진 전통
규슈 조선중고급학교의 가야금병창부는 1960년대 말부터 재일본 조선인 중앙예술축전(현, 재일조선학생 중앙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70년대에는 학생부문 가운데 고급부 1등상 수상. 이후 가야금병창의 강호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그 ‘시작’을 기억하고 있는 이를 찾아갔다.

- 규슈 중고급학교 가야금병창부 초창기 멤버. 중앙예술축전 경연장이었던 조선대학교에서 -
두 차례나 성공시킨 공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선학교에 처음으로 민족악기를 보내온 것은 1966년 5월이다. 도쿄 조선제1초중급학교(도쿄 아라카와 구)를 시작으로 일본 각지에 있는 조선학교에도 악기를 보내왔다. 또 여성동맹에서도 가야금 서클 등이 점차 확대되어 갔다.
야마구치 현 시모노세키 시에 거주하는 김초홍 씨(66)는 1966년 시모노세키 조선초중급학교(당시)의 중급부 2학년이었다. 어느 날 교원에게 “집에 가야금이 있는 학생은 갖고 오라.”는 말을 듣는다. 이 학교에 부임한 장정희 씨에게 들은 말이다.
“당시 어머니들이 모여 가야금을 연주하는 일이 굉장히 유행이었어요. <살랑~살랑~살랑~>이나 도라지 노래를 부르기도 했죠.”(김씨)
곧바로 다음 날 몇 명이 가야금을 들고 학교에 왔다. 가야금 서클에 소속되어 있던 어머니가 가야금을 갖고 있었기에 김씨도 참여했다. 조선학교의 아동, 학생들이 민족악기를 접할 기회가 전국적으로 늘어난 시기였고 이렇게 시모노세키 초중급학교에도 가야금병창부가 생겨났다.
이듬해인 1967년, 서클 내에 중3은 자신밖에 없었기 때문에 김씨가 주장을 맡았는데, 고급부 과정부터 진학한 규슈 조선중고급학교에서 이전부터 동경해 왔던 무용부에 들어간다. 중고급부에 가야금병창부가 없었던 것도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그 다음해에 진학한 후배들에게 “언니, 가야금병창부가 없으니 우리가 만들자.”는 부탁을 받고 “어떻게든 도와줄 테니, 너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 보라.”며 후배들을 응원했다.
“매일 아침에 시모노세키에서 오리오(折尾)까지 치마저고리를 입고 가야금을 들고 다녔어요. 동아리활동이 끝나면 집에 가야금을 가져와 다시 연습했죠. 그때는 정말 힘들었어요.”(김씨)
그러다 규슈 중고급학교에 있던 가야금을 발견했다. 끊어진 가야금 줄을 다시 잇고 장식도 새로 만들어 고쳤다.
우베 조선초중급학교(당시)에서 가야금병창부에 소속된 동급생이 있었기 때문에 협력하며 동아리를 활성화 시켰다고 한다. 이처럼 규슈 중고급학교의 가야금병창부는 야마구치 출신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곳이라고 김씨는 기억하고 있다. 후배들의 강한 염원도 있어 김씨는 고급부 졸업 때까지 가야금병창부에서 활동했다.
중앙예술축전 무대에
재일조선학생 중앙예술경연대회의 전신인 재일본 조선인중앙예술축전(이하 중앙예술축전)이 정기적으로 열리게 된 것은 1968년.
당시에는 일반부분(청년부/일반부)과 학생부문(초급학교부/중급학교부/고급학교부)으로 나뉘었고, 분야도 노래, 악기, 무용 외에 시 낭독, 만담, 연극 등이 있었다. 도쿄 고다이라 시에 있는 조선대학교 강당이 경연장이었다. 개최 회수를 헤아려 보니 이전까지는 비정기적으로 2차례 열렸지만 64년 이외에는 확실한 정보가 없다.
규슈 중고급부 가야금 병창부는 생긴 후 얼마 되지 않은 69년부터 중앙예술축전에 참가했다. 이 학교에서 음악교원을 하고 있던 신성방 씨가 고문을 맡았다. 신 씨는 가야금 연주경험이 없어 오로지 노래지도만 맡았다고 한다.
이 무렵에는 민족악기의 전문적인 기술지도가 가능한 교원이 전국적으로 거의 없었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라서 규슈 중고급학교 가야금 병창부도 학생들 스스로가 시행착오를 거쳐 하나하나 익혀 연주를 만들어 갔다.
“대회 과제곡이 나오면 악보를 집에서 계속 보며 연습해 다음 날 부원들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말하는 김초홍씨. 음악수업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필사적으로 연구했다고 한다. 음감이 좋았던 것도 행운이었다. 연습을 거듭해 드디어 대회 참가의 날을 맞이했다. 김씨를 비롯한 2학년이 3명, 그밖에는 1학년인 멤버들로 대회에 나갔다.
결과는 2등. 1등은 오사카 조선고급학교, 2등에는 도쿄 조선중고급학교도 있었다. 3등은 고베 조선중고급학교였다. 통상적으로 중앙예술축전에서는 1등을 수상한 학교만이 우수작품발표(당시의 호칭은 모범연주·연기)무대에 설 수 있었는데, 김씨의 기억으로는 규슈 중고급학교 가야금 병창부는 자유곡으로 특별상을 수상해 우수작품 발표 무대에도 올랐다고 한다.
염원하던 1등, ‘강호 학교’의 기초를 만들다
이 결과는 지역 동포들에게 큰 화제가 되었다. 김씨의 말에 따르면 규슈 중고급학교에서 가야금 병창부에 대한 기대가 중앙예술축전 후에 ‘완전히 달라지고 좋아졌다’고 한다. 현장에서는 ‘지방에서, 아직 실적도 없는 무명의 동아리가 중앙대회에 나갔는데도…’ 이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도쿄에서 돌아오니 선생님들이 ‘뭐 부족한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며 김씨가 환하게 웃는다.
가야금 병창부에는 박자를 맞추기 위해 장구를 치는 멤버가 필요했는데 첫해에는 이것도 없었다. 이를 부탁하자 다음해인 70년에 장구를 치는 고수도 참여해 다시 중앙예술축전을 목표로 삼았다. 반복적으로 합숙도 하며 맹연습을 거듭한 결과 드디어 1등을 수상한다. 연주한 곡은 <귀틀집 실물레>다. 그해 조선신보(10월 31일자)에는 규슈 중고급학교 가야금 병창부의 활약이 소개되어 있다.
(이하, 기사에서 발췌)
《고급부 학교 가야금 병창부분에서 1등을 한 규슈 조선중고급학교 가야금부원들은 감격의 눈물을 억누르지 못했다.(중략)… 더욱이 가야금 부원들은 여름방학을 이용해 <120일간 혁신운동>에 전력을 다한 만큼 분회동포들과 자연스레 함께 하게 되었고 가야금연주를 통해 커다란 힘과 용기를 주었다.》
“이때부터 규슈 중고급학교 가야금병창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해요.”
이후로 규슈 중고급학교 가야금병창부는 중앙대회에서 여러 차례 수상했고 ‘강호 학교’로서 전통과 긍지를 쌓아가고 있다.
*월간 <이어> 2020년 2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