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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학교 시리즈

발생기의 우리학교 Vol. 50 조선유치원(하)

작성자 몽당연필
작성일 20-01-10 17:26 | 485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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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기의 우리학교 Vol. 50 조선유치원(하) _1970년대의 교원들



'훌륭한 조선인'이 되길 바라는 염원을 받아들여 

1950년대부터 각지의 조선학교에 부속된 형태로 생겨났던 조선유치반.  78년에 도쿄의 조선대학교에 유치반 교원을 양성하는 <교양원과(현재의 교육학부 보육과)>가 생길 때까지는 초급부 교원 경험자나 일본대학에서 보육을 전공한 여성들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아이들의 '양육'을 도맡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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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도쿄 제1초중급학교 부속유치반의 모습. 춤과 노래 발표회에서 상연된 연극 <개미와 매미> - 


히가시 오사카 유치반에 100명의 원아

조선유치반은 1950년에 아이치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후 60년대에는 오사카에 연이어 생겨났다. 오사카에서는 64년 히가시 오사카 제5초급학교를 시작으로 히가시 오사카 제3초급학교(66년), 히가시 오사카 제1초급, 제2초급, 조호쿠(67년), 센슈(68년), 히가시 오사카 제4초급, 나카 오사카, 미나토(69년), 후쿠시마, 센보쿠, 기타오사카(70년) 등에 잇달아 설립되었다. 71년부터 유치반 교원이 된 박신재 씨(74, 오사카부 거주)는 "유치반은 초급부의 토대를 만드는 장소"라 여겨 교원을 지원했던 한 사람이다. 

45년에 현재의 오사카부 모리구치시에서 태어난 박씨는 부모님이 전라남도 출신의 재일조선인 2세로 4형제 가운데 막내다. 나카니시 조선소학교, 오사카시 니시이마자토 중학교를 거쳐 오사카 조선고급학교로 진학, 고2 2학기부터 사범과로 진학해 교원을 목표로 삼았다. 어릴 때 자란 집안은 민단계로 집에서는 심한 반대를 했음에도 큰 오빠가 이해해 주어 이쿠노와 히가시 오사카 제5초급에서 초급부 교원으로 근무했다. "당시 히가시 오사카 제5초급은 오사카에서 가장 큰 학교로 유치반도 맨 처음 만들어졌어요. 유치원 원아들만 100명이 있어서 6, 7반까지 있었던가. 일본학교의 보육과 출신인 최순옥이라는 선생님이 원장을 맡고 있었죠." 68년에  결혼한 박씨는 장남을 출산한 후에 후쿠시마 초급학교로 부임. 유치반이 설립된 이듬해인 71년부터 유치원 교원으로 하나씩 배워가는 나날을 보내게 된다. 


박씨가 먼저 도전한 것은 조선어였다. "얏따(やった) 입니다 : 했습니다, 키따(来た) 입니다: 왔습니다, 타베따(食べた)입니다 : 먹었습니다, 처럼 일본말과 조선말이 뒤섞어 우리식으로 고치도록 했습니다. 아이들 앞에 서는 이상 교원이 일본어를 일절 사용하지 않고 100% 조선어를 씁니다. 일상의 흐름에 따른 말을 교원들이 말하도록 <손 씻기 하자요> 등 몸에 관한 초보적인 말부터 이닦기나 식사에서 사용하는 말을 골라서 가르쳤습니다. 어쨌든 반복, 들려주기, 말하기, 기억하게 해주기의 반복이었죠."

"잘 되지 않으면 방법과 수단을 연구하는 수밖에 없어요. 처음에는 월별로 커리큘럼을 만들었는데 그것으로는 막연했기에 주마다 만들었어요. 보육반(최연소반)에서 어떤 말을 가르치고 중간반에서 어떻게 확장시킬 것인가, 상급반에서 어떻게 심화시킬 것인가. 가르치는 우리말의 수나 종류를 연구하고 동화나 우화, 입말을 섞어가는 등 오사카 부내 교원이 월1회 모여 연구회도 했습니다. 초기에는 초급학교처럼 의자에 앉히고 가르쳤는데 이것도 아이들의 실태에는 맞지 않아서 그만두었습니다." 


인형극과 조선요리를 통해 우리말을 배운다 

1967년부터 아카시 조선초급학교에 부임한 이재임 씨(80, 효고현 거주)도 70년대부터 유치원 교원이 된 한 분이다. 75년부터 아카시 초급학교의 유치반 교원이 된 이씨는 수업방법을 배우러 박씨 등이 기획했던 오사카의 공부모임에도 갔다고 한다. "당시에는 지도방법의 연구가 활발했어요. 효고에서는 인형극과 조선요리를 만들면서 우리말을 가르쳤어요. 아이들과 산에 가서 도토리를 주어 와서 묵을 만드는 겁니다. 한동안 말려두어 도토리 껍질을 벗기죠. 아이들이 껍질을 벗기고 삶으면 갈색의 떫은 앙금이 나와요. 떫다라는 말도 가르치고요. 하지만 아이들은 <떫다>가 어떤 맛인지 모르죠. 땡감을 가져와서 맛을 보게 하거나 떡이나 화전을 만들면서 오감을 이용하고 놀이를 통해 우리말을 가르쳐 나갔습니다."


이씨는 도쿄 조선중고급학교 임시교원양성반을 1기생으로 졸업한 후 시즈오카현의 하마마쓰에서 교원생활을 시작했다. 결혼 후에 효고현내 조선학교로 부임했다. 니시고베, 아카시, 다카사고 등에서 교원을 하며 42년의 교원생활 가운데 31년을 아카시 초급학교에서 보냈다. 당시 보호자들 다수는 2세로 '조선유치반에 보내는 이상 훌륭한 조선인으로 키워주길 바라는 마음이 강했다.'고 이씨는 말한다. "위생실에 갔다오겠어요." 같은 말을 집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되자 같은 말을 쓰도록 아이에게 지적 받으며 부모님과 함께 크게 웃었지요." 1세가 줄어드는 가운데 가정에 조선말의 숨을 불어넣은 것이 원아들이었다. 


조선식도 일본식도 아닌 보육이 되기도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전반에 걸쳐 유치반 교육은 조선식도 일본식도 아닌, 재일조선인 유아의 실정에 중점을 두어 그 목적과 유치반 교육의 방향을 모색한 나날들이었다. 또 구체적인 방법은 아이들이 생활하면서 놀이나 경험, 아이들의 자발적인 흥미, 관심을 중시한 보육방법으로 전환해 나갔다. (* 인용 <일본에서 조선학교 부속유치반교육의 성립과 전개>(서영애, 2014 도쿄  가쿠게이대학 교육학 연구과 석사논문))

조선어, 숫자 세기, 자연, 사회, 체육, 노래놀이, 그림과 만들기 등의 영역이라는 개념이 만들어 지고, 구체적인 방법론을 모색해 나갔다. 

'초급부식 보육'에서 일상생활의 흐름을 의식한 '자연스러운 보육으로'. 

도쿄 조선제1초중급학교 부속유치반에서 오랫동안 교원으로 일해온 정향순 씨(74, 도쿄도 거주)는 '자연스러운 보육'을 의식해서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던 그 시절을 회상했다.  "늦가을 날에 산책을 나가잖아요. 어떤 꽃이 피어 있는지, 어떤 사람이 길을 걷고 있는지, 길가를 달려가는 자동차는 몇 대인지를 관찰해요. 교원들이 어떻게 이끄느냐에 따라 다양한 영역의 학습이 가능해요. 미카와시마의 조선마켓에 가서 할머니들이 팔고 있는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보면서 말을 익히죠. 거기서 사온 식재료로 만두국도 만들어서 먹어보죠. 아이들은 놀이나 경험을 통해서 정서가 만들어져 갑니다."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정씨는 충청북도에서 태어난 1세다. 해방 이후 아버지는 식민지시기에 받은 심한 고문으로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 혼자 손으로 자식들을 키웠다. 일본으로 건너온 후에는 일본의 교육을 받았는데, 오빠가 힘을 써준 일도 있어서 도쿄중고 중급부에 중학교 3학년부터 편입했다. 교원을 강하게 희망했지만 일본국적이라 길이 막혀  도쿄중고의 직원이 된다. 이 학교의 교원과 결혼한 후 '조선적을 취득했을 때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눈물을 글썽인 정씨는 결혼 후에도 꿈을 접지 않고 통신교육으로 보육을 배운 것이었다. 장남, 차남을 출산한 후 그간의 염원을 이루어 드디어 70년에 유치반 교원이 된다. 도쿄제1초급에서 30년 간의 교원생활을 통해 배출한 아이들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이며 '유치반의 보호자들은 일단 입학을 시키면 마지막까지 선생님들에게 맡겨 주었다."며 현역시절을 회상했다. 


앞서 나온 박씨는 '유아들은 유치반이라는 생활공간 안에서 조선말을 익히고, 자신이 조선인임을 자각해 나간다. 환경이야말로 전부가 아닐까요." 라고 말한다. 

오감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유아기, 아이들의 '둘도 없는 감성'을 발굴해낸 여성 교원들의 실천과 연구의 나날은 민족교육에서 '유아기의 가능성'을 발견한 나날이었다. 80년대에 들어서자 통일된 교재를 만드는 등 조선유치반의 교육은 발전해 나가고 있다. 


* 월간 <이어> 2020년 1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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