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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학교 시리즈

발생기의 우리학교 vol.49 조선유치원(상)

작성자 몽당연필
작성일 19-12-27 17:14 | 703 | 0

본문

발생기의 우리학교 vol.49 조선유치원()   (글 장혜순, 전기일)

 

유아에게도 민족교육을” 60년대부터 잇달아 시작

1948~49, 일본정부와 GHQ에 의한 조선학교 탄압이 작열했는데 우리 아이에게 민족교육을시키자는 염원까지는 없앨 수 없었다. 1950년대에 태어난 조선유치원은 일하는 어머니들의 요구와 계속 늘어가는 학생 수, 조국으로 귀국하자는 열망으로 동포사회의 염원에 뒷받침 되어 6, 70년대에 그 수가 급속이 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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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오카 조선초급학교 부속유치반. 원아들이 치마저고리, 바지저고리를 입고 있다(1960년. 후쿠오카 조선초급학교 제공)
 

 

먹고 살기 위해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 시의 쓰루미 조선유치원은 19491019, 일본당국의 조선학교 폐쇄령이 내려진 이후 민족교육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일본의 소학교 공립분교로 운영되던 쓰루미 조선학교(요코하마 시 시타노야 소학교 오노분교)의 부속유치원으로 534월에 설립되었다. 당초에는 원아가 48, 교원 1명이었다. 당시 학교 뒤 조선부락에는 상당수의 동포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힘든 생활고 가운데 모인 자금과 동포 스스로의 노력으로 학교 한쪽에 만들어진 <판잣집 보육실>11평 남짓. 쓰루미 유치원에서 처음 교원이 된 진효선 씨(당시 21)의 회고를 소개한다.

당시에 대부분의 동포가 일일노동자라서 그런 상황에 어머니들이 어린 아이를 그대로 집에 두고 나갈 수 없으니까 방법이 없겠냐는 의견이 나오면서 시작되었어요. 먹고 살아야 되었으니까요.”

아이들은 도시락도 갖고 오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3간식시간은 과자가 아니라 110엔짜리 빵을 사서 나눠주었어요. 한 달에 250(보육료)밖에 받지 않은데다 그것조차도 내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고철상을 하던 이사장이 아이들에게 빵 하나라도 더 사주길 바란다.’고 하시며 가끔 천 엔이나 오백 엔을 갖다 주셨죠.”(1)

50년대 아이치 현에는 아이치 제1초급과 아이치 제8초급 두 학교에 유치반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1957년에 유치원 강화 방침

재일본조선인연합회의 전체대회 보고에서 조선유치반의 설립에 관해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1957년 제3회 전체대회에서다. 보고에서는 <시설, 그 외 조건이 갖추어진 자주학교, 공립분교에서는 유치반을 설치하고 취학 전 아동교육에도 힘을 쏟아야 한다>는 유치반 신설방침이 나왔다. 58년 제4회 전체대회 보고에서도 <각 초등학교에도 가능한 유치반을 신설하고 학교 입학 전 교육을 강화해야만 한다>고 했다.

이 무렵 조선학교는 아동·학생 수의 증가라는 현실에 직면에 있었다. <조선학교 취학아동 수는 58년도에 6,300명으로 증가, 5992학기가 시작될 때에는 약 5,000, 601월에도 약 2,700명이 입학, 60년 신입생 및 편입학 원서접수는 7,000여 명으로 그 결과 594월에 23947명이었던 취학아동 수가 604월에는 36516명으로 늘어나 151.5%증가했다.>(2)

조국으로의 귀국열풍이 뒷받침 되었고 아동·학생 수가 급속히 늘어나는 가운데 전국적으로 학교 신설·증축·개축이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초급학교 부속유치반이 많이 설치되었다.

조선대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원에서 조선유치반의 역사에 관해 연구한 서령애 씨(30, 쓰루미 조선유치원 교원)에 따르면 조선학교의 부속유치반은 60년대까지 아이치, 효고, 오사카 등 간사이 지방에서 그 숫자가 늘어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에는 60여 곳이 넘는 확장세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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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치 조선제1초급학교 연혁사진에서, 유치원 제1기졸업생(1953년도)_ 서령애 씨 제공) - 
 

 

민족교육의 일환으로서

63316일자 <조선신보>에는 우리의 유치원을 보다 많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게재되어 있다.

<‘우리 조선유치원이 있으니까 얼마나 좋은가!’ 최근에 어디를 가더라도 이런 말을 하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조선유치원의 설립문제는 취학 전 아이들이 있는 동포들에게 큰 관심사이고 절실한 염원이기도 합니다. 기사에는 총련중앙의 리정수 부부장의 코멘트가 있는데 앞으로 민주주의 민족교육체계의 일환으로 우리 유치원을 많이 설립해야만 합니다. 신년도에는 효고 현 히가시 고베에 2곳이 설립되는 것을 포함해 도쿄 등 큰 지역에서도 준비 중입니다.’라고 말했다. 민족교육에 있어 유치반은 취학 전 교육의 일환이라는 위치가 부여되기 시작했다.

이해 4월에 설립된 곳이 가네히라(金平) 단지의 후쿠오카 조선초급학교 부속유치반이었다. 604월에 창립한 후쿠오카 초급학교는 624월에는 가네히라 단지로 이전. 단지에는 60년대에 후쿠오카 시에 의한 구획정리 때문에 철거를 당해야 했던 재일조선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학교가 이전된 일로 단지에 사는 동포 수는 증가한다. 가난한 살림 속에 일을 찾아 나가거나 단지 내의 조선학교 교원으로 일하는 어머니들 중에 아이들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곳을 설치해 주기 바란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다 63, 2층짜리 건물 학교교사와는 별도로 가네히라 단지의 협동조합사무소 내에 부속유치반이 설립되었다.

많은 동포들이 살고 있으니까 보호자들이 안심하고 아이를 맡길 수 있었다.”고 말하는 이는 가네히라 단지에 55년 이상 살아오며 오랫동안 협동조합에서 근무하는 김영숙 씨(83). 김씨는 당시 유치원 교원이 3명 정도이고 원아는 10여 명이었다고 기억한다. 수업료는 무료이고 교원도 자원봉사. “대부분의 원아는 교원이나 상근활동가의 아이들이다. 가족과 같은 분위기였다.”고 말하는 김씨. 유치원에서는 조선어와 조선의 노래를 배우고 점심시간에 원아들은 어머니가 만들어 준 도시락을 갖고 와 함께 먹었다고 한다.

후쿠오카에서는 7710월에 기타규슈 조선초급학교 부속유치반이 생겼고, 804월에는 독자적인 유치원 건물을 가진 고쿠라 조선유치원이 설립되었다.

앞서 나온 서씨는 조선유치반이 각지에서 확대되어간 의의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선유치반은 재일조선인 아이들이 조선의 말과 문화, 풍습을 배우고 몸에 익히는 교육환경을 유아기부터 만들어 줌으로써 그 후 학교교육을 자연스럽게 받을 수 있는 기초적 토대를 닦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또 유치반을 통해 육아경험이 부족한 보호자들과 연대, 흩어져 있는 재일조선인을 찾아내 서로 연결해 주며 동포 커뮤니티를 넓혀간 것입니다.

(다음 호에 이어짐)


* 월간 <이어> 201911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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