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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차별과 무관심 속에 흔들리는 ‘재일 조선학교’

작성자 몽당연필
작성일 19-04-03 14:41 | 201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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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무관심 속에 흔들리는 ‘재일 조선학교’

김명준(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 / 영화 ‘우리학교’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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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이 현의 작은 조선학교 학생들.

2시간 이상의 등하교 시간이 걸리는 먼거리를 통학한다.


 


일본정부가 2019년 10월부터 ‘어린이보육지원법’을 각의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고등학교 수업료 무상화’에 이어 ‘유아교육 무상화’를 실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조선 유치원’은 제외됐다. 고등학생뿐 아니라 유치원 아동들까지 ‘법과 제도의 평등한 보호’에서 밀려난 것이다. 2010년 고등학교 수업료 무상화 정책이 시행될 당시 문부과학성 사무차관이던 마에카와 키헤이는 이를 ‘관제 헤이트정부가 주도하는 혐오·차별’라고 이야기한다. 2010년부터 일본에서는 국가가 자국에 거주하는 소수집단을 법과 제도의 울타리 밖으로 밀어내는 잔혹한 행위가 벌어지고 있다. 이는 ‘관제 헤이트’를 넘어 ‘관제 이지메’, ‘관제 인종차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가능하게 한 일본의 시스템을 논하기 전에 그 대상이 유독 ‘재일조선인’이라는 사실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해방 직후 재일조선인은 ‘일본 국적’을 보유한 채로 ‘외국인’이 된다. 1947년 외국인 등록령에 의해 ‘조선적’(당시 남북 양측에는 아직 정부가 없었다)으로 분류된 것이다. 이들은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위해 500여 개의 ‘국어강습소’를 만들고 ‘조선인학교’로 교육체계를 정비해 갔다. 그러나 1년 뒤인 1948년, 일본 정부와 재일 미점령군은 위협적으로 세력을 키워가던 ‘재일조선인연맹’이하 조련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학교 폐쇄령’을 내린다. 이는 전후 최초로 ‘비상계엄령’이 내려질 정도의 거센 반발을 부른다. 재일조선인 3,000여 명이 검거되었고 200여 명이 구속되었으며 오사카에 살던 16살의 김태일이 총에 맞아 사망한다. 이른바 ‘4.24 교육투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 같은 재일조선인의 거센 반발에 한발 물러서는 듯했던 일본 정부는 1년 후인 1949년, 조련과 조선학교를 일제히 해산, 폐쇄한다. 일본 국민인 재일조선인들이 독자적인 교육을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조선적’을 외국인이라 규정할 때와는 다른 잣대를 대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1949년부터 1955년까지 6년 동안 조선학교는 국가시설인 ‘공립 조선인학교’로 편입되어 운영된다. 그러나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었을 때, 재일조선인들은 국적 선택의 자유는커녕 일방적으로 ‘일본 국적’을 박탈당한다. 결국, 이들은 무국적자이며 기호에 불과한 ‘조선적’으로 살게 된 것이다. 외국인 등록증을 상시 소지하고 있어야 하고, 불심검문에서 외국인 등록증을 미소지 하면 언제라도 추방될 수 있는 이방인, 그것이 조선적이었다.


 


일본 국적을 박탈당했으니 조선적은 더 이상 일본 국민이 아니었다. 이는 ‘독자적인 민족교육’이 가능하다는 말이었기에 조선학교는 다시 동포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6년간의 암흑기를 거친 조련은 한반도 북쪽에 수립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하고 나섰고, 재일조선인의 인권과 ‘공화국 공민’으로서 ‘조국 발전’에 기여한다는 노선을 확립하고 ‘재일조선인총연합’(이하 총련)으로 변모한다. 재일조선인 전체를 하나의 개체로 놓고 보자면 이는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수단이었다. 조선학교 또한 빈곤과 억압에서 살아남고자 최후의 방법을 택한다. 바로 ‘각종학교 인가 획득 운동’이다. 일본 교육법상 제1조에 해당하는 1조교 즉, 국·공·사립학교가 아니라 그 하위 개념인 ‘각종학교’를 획득하려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문과성의 지도지침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 정부가 아니라 지자체 장에 의해 인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이유다. 다시 말해 민족교육의 독자성뿐만 아니라 법과 제도의 보호를 받기 위함이었다. 1953년 교토를 시작으로 155개의 조선학교가 각종학교 지위를 받기까지는 무려 20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



조선 학생들의 학생 통학 정기권 할인이 시행된 건 1994년에 들어서였다. 치바의 조선학교 어머니회가 문제의식을 느껴 시작한 운동이 결실을 본 것이다. 일본의 중고생이라면 당연히 참가하는 ‘공식 스포츠 대회’에 또한 1995년 이후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일본의 계획이나 호의가 아니라 ‘행정실수’ 때문이었다. 조선학교는 이 행정실수를 놓치지 않고 전국의 양심들을 불러 모아 함께 일을 도모했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것은 조선학교가 2019년 현재도 각종 중고 체육연맹에 ‘정식 가맹’이 아니라 ‘준가맹’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2000년 초반에 풀렸다고 알려진 ‘대학 입학 자격’ 문제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애초 일본 정부는 외국인학교의 대학입학 자격 제한을 풀면서 아시아계 학교만 제외했다. 여론의 성화가 강해지자 결국 아시아계 외국인학교도 대학 입학 자격 제한에서 풀어줬지만 ‘조선학교’는 제외한다. ‘차별’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형성된다 하더라도 조선학교에 대한 차별은 ‘차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인 걸까? 일본 정부는 ‘조선학교는 각 대학의 자율에 맡긴다’며 국가의 책임을 민간에 떠넘겨버렸다. 이후 거의 모든 대학이 ‘조선학교’에 대해 입학 자격을 주고 있어 겉으로는 나아진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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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의 인권, 특히 아이들의 교육평등권은 단 한 번도 그냥 주어진 적이 없다. 아무리 작은 권리라 하더라도 긴 세월 투쟁을 거쳐 얻어내야 했다. ‘관제 헤이트’가 2000년대 들어서 ‘납치문제’의 작용으로 발생했다는 논리는 애초에 틀린 것이다. 그렇다면 ‘고교 수업료 무상화’와 ‘유아교육 무상화’에서 조선학교만 쏙 빼고 제도 적용을 해도 그것이 ‘공적인 차별’과 무관한 것으로 이해되는 현상의 저변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 걸까? 특정 민족, 국가에 대한 ‘증오’와 ‘멸시’라는 사회적 공감대를 논하기 훨씬 이전에, 세대를 넘어 이어 온 ‘습성’ 또는 ‘문화’로 자리 잡아 버린 ‘관성’이 있는 건 아닐까?


 

누군가는 말한다. ‘타향에서 살기를 택했다면 다소의 차별은 견딜 수밖에 없다’고. 그러나 이 말을 재일조선인에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한 번도 그 땅에 살기를 스스로 선택한 적이 없고, 그들에게 가해진 차별은 어느 시기가 지나면 해소되거나, 고향으로 돌아와 해소될 임시적 차별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충 훑어본 역사에서도 드러나듯 그들의 시간은 싸워 이겨 온 기록으로 가득하다. 이런 상황을 견디고, 극복하면서 조금의 ‘패배의식’도 없이 굳건히 그 자리를 지켜온 이들의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나는 ‘우리 학교’라 생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은 이미 70년 전에 조선학교의 중대성을 알았고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든 없애려 했다. 동포들은 조선학교의 중요성을 알았기에 ‘우리 학교’만은 호락호락 건네줄 수 없다며 맞섰다. 북한 또한 재일 민족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57년 전부터 지원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일하게 빠진 건 대한민국 정부뿐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한반도 남단에 사는 우리 모두다. 우리는 애초에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조선학교 이야기를 할 때마다 우리의 ‘죄책감’, ‘부채’를 강조해 왔다. 그러나 이미 그럴 단계는 지났다. 7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선학교는 간신히 버텼고, 지금도 간신히 버티고 있다. 남북 양 정부가 공통된 입장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곧 맥이 끊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행동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한다.


출처 : 동북아역사재단 뉴스레터 

https://www.nahf.or.kr/webzine/view.do?cid=59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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