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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유의 동포 이야기

네 번째 이야기 - 고향에서의 삶 (재일동포 3세 S씨)

작성자 몽당연필
작성일 21-07-12 18:03 | 201 | 0

본문

고향에서의 삶

재일동포 3세 S씨

재일동포는 저마다 다양한 뿌리과 배경을 가지고 있다. 


S씨는 일본에서 나고 자라 일본 학교에서 생활한 재일동포 3세이다. 경상남도 고성군이 고향이었던 친조부가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일본에 건너왔다. 초기에는 고베에서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러가지 사정이 겹친데다 조부가 일본 도호쿠(동북) 지방을 좋아해서 그곳으로 이주해 미야기 현의 조용한 땅에 정착했다.


한편, S씨의 어머니는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 일본으로 시집 온 순수 한국인이었고 아버지가 재일동포 2세이기 때문에 그녀는 재일동포 3세에 해당된다고 한다.


숲이 우거진 도호쿠 지방 미야기 현은 지방이라서 그런지 외국 국적 가정이 드물었다고 한다. S씨의 동급생 중에는 필리핀과 일본 사이의 혼혈인 친구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일본사람이라서 이름과 성이 통명(일본명)과 가타카나를 혼용하지 않았고, 그래서 일본인 아이들의 이름과 다름이 없었다. S씨에게는 본명(한국명)외에 통명(일본명)이 없었다. 그래서 이름 만으로도 일본인 친구들과 달라 주목을 받은 적이 많았다. 그래서 이름 때문에 주위 친구들에게 놀림 당하는 일이 가끔씩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어머니가 한국 태생이니 일본인 어머니와는 다른 언행이나 발음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기도 했다. 그 시절의 스트레스는 그대로 트라우마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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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한국에서 살고 있으며 여러가지 경험을 쌓으면서 트라우마를 극복했고 ‘귀화’를 하려는 마음은 전혀 없다. 그러나 당시에는 주민표를 제출할 때 서류 색깔이 다르거나 어렸을 때의 놀림받은 경험들 때문에 머지않아 반드시 귀화하려고 생각했다. 그래도 당시는 한류붐의 시절이었고 2세들이 살던 시대와는 달리 한국을 우호적으로 생각하는 일본사람도 늘어나고 있었다. 


학교의 보건실 선생님과는 특별히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맛있는 김치 담그는 법 가르쳐줄래?” 라는 선생님에게 어머니가 쓴 레시피를 건네 준 적도 있다. S씨 자신도 한국어를 공부한 이후에  친구들로부터 한국말을 가르쳐달라는 부탁도 받았을 정도다. 트라우마도 있었지만 시대의 변화를 통해 즐거운 기억도 많았다고 한다. 


일본학교 출신이라서 유소년기에는 거의 한국어를 배울 기회가 없었고 성인이 되기 전까지 한국어를 전혀 몰랐다. 성인이 되어 정체성이 형성됨에 따라 자신은 ‘재일’이므로 조국에 건너가 조국의 말을 배우고 싶다고 어머니에게 상담했을 때 “한국어를 배워서 어디다 쓰냐? 거기에 가서 살아서 뭐하니?”라며 반대했다.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그녀는 젊었으며 나중을 생각하지 않고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마음 하나로 혼자 고향땅을 밟기로 결심했다. 


그렇게해서 2015년 충청남도 공주시로 우리말을 배우기 위한 유학의 길을 떠났다. 충청남도 공주시에 소재한 국제교육진흥원에서는 매년 재일동포 모국수학 프로그램을 국립공주대학 한민족교육센터에서 실시한다. 한반도에 뿌리를 둔 세계 각국의 재외동포가 어학 습득, 대학진학 준비를 위한 언어 취득을 목적으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S씨도 여기서 7,8개월 과정을 수강했다. 이후 일단 귀국한 그녀는 이미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에 생계 유지를 위한 취직활동을 벌였다. 그러다가 여러가지 우연이 겹쳐 제주도에 있는 어느 고교에서 제2외국어 일본어 교사로 취직해 제2의 한국생활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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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유학생활과는 다르게 한국에 이주한 후의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유소년기에 한국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그녀다. 8개월 어학연수를 통해 간단한 회화는 가능하다 해도 일상회화를 완전히 습득하는 것은 아직 힘들다. 생활용품이나 식품 등의 이름도 모르는 것이 많아 충분히 조사를 하고 구입하러 가야할 정도였다. 

문화도 차이가 날 뿐아니라 아랫사람이 윗사람 먼저 움직이면 안되는 등의 문화도 일본과는 달랐다. 또 음식점에서 일본 친구들과 일본어로 이야기하고 있을 때 ‘일본사람이예요?’ 라는 말을 듣거나, 새로 사귄 한국 친구의 지인을 만났을 때 “일본 사람?” 이라고 질문 당했을 때,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재일한국인인 그녀였지만 한국말이 서툴러 스스로를 당당히 한국인이라고 표현할 수 없어 답답했다고 한다. 


이런 갈등은 재일동포 유학생 대부분이 경험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말했다. 


“우리 재일동포에게는 여러가지 패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양친 중 한쪽이 한국인, 한쪽이 재일동포인 경우, 뿌리는 한반도에 두고 있지만 귀화를 해 일본국적인 분도 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한국이 나의 뿌리라고 의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많이 겪었지만 저 보다 어린 세대는 어떨까 걱정됩니다. 세대나 시대에 따라 여러가지 생각이 있을 수 있으나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 앞으로도 일본에서 살아갈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재일동포도 계시지만 한국어를 공부해서 우리말로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계가 완전히 달라보입니다. 일본어로 정보를 얻는데 그치지 않고 한국어로 정부를 얻게 되면서 일본의 매스컴 만을 믿는다는 것이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언어를 배워 습득하게 되면 세계가 더 넓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세대들이 여러가지 경험을 할 수 있길 바랍니다.” 


조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우리 재일동포 3, 4세가 수많은 경험을 통해 다음 세대에게 무언가를 전할 수 있는 역할을 수행한다면 그것이야말로 1세, 2세 동포의 은혜를 갚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필자는 그런 확신을 가지고 실천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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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원문

故郷での生活

在日3世 S氏


在日同胞といっても各それぞれの、ルーツや生い立ちがある。

今回インタビューさせていただいたS氏は、日本で生まれ育ち、日本の学校で学生生活を送った在日3世の在外同胞である。故郷を慶尚南道の巨城郡で父方の祖父が、当時苦しい時代だったこともあり朝鮮半島から日本に渡ってこられ、日本に渡ってきた当初は、生活の基盤を神戸で過ごしていたという。しかし様々なことが重なり、更に祖父が東北の地が気に入ったこともあり、東北の地に基盤を映し宮城県のひっそりとした地で生活をはじめた。


一方、S氏の母は、韓国で生まれ育ち日本に嫁いできた純粋な韓国人で、父が在日2世であるために在日同胞3世に該当する。


緑豊かな東北地方の宮城県には、地方ということもあり外国国籍の家庭はなかなか珍しかったという。S氏の同級生の中にフィリピン人のハーフの友人がいたが、その子の父は日本人で、名字と名前は通名やカタカナが混ざるのではなく日本の子たちと遜色ない名前だったという。S氏は、通名を持っておらずやはり名前を見ると一目瞭然に周りの子たちと違い、注目を受けることが多々あった。


名前で、周りの友達にからかわれることもしばしばあったと話してくれた。

更に母が韓国から嫁いできた来たこともあり、周りの友達のお母さんと言動や発音の違いがあったことから、その点でもしばしば友達たちにからかわれ、その時の嫌な思いをしたことがトラウマになってしまったという。


今は現時点では、韓国で生活の基盤をおき、いろいろな経験を糧にしてトラウマを克服され帰化をしようとは全く考えていないそうだが、当時は、住民票を提出する際に書類の色が違ったり、からかわれたことで、将来必ず帰化をすると考えていた。しかしその当時は韓流ブームなどもあり、2世の方々が生きてこられた時代よりも韓国を友好的思う日本人も増えていた。

S氏の周りの人たちも、そうだったと話してくれた。

学校の保健室の先生とは、特に仲のいい関係だったのだが、「おいしいキムチのつけ方教えて」と聞いてきて、母の書いたレシピを渡したり、S氏自身も韓国語を勉強し習得してからは、周りの友達たちが韓国語を教えてほしいとお願いされたりと、時代の変化の中でトラウマもあったが、嬉しい事もたくさんあったという。



日本の学校出身とあり、幼少期はほぼ韓国語を学ぶ機会がなく、成人になるまではほぼ韓国語を話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 成人になり、アイデンティティの形成の中で自分が‘在日’であり、祖国の国の言葉を勉強したいと母に相談したところ、「韓国語を勉強してどうするんだ、住んでどうするんだ」と反対されたショックを受けた。しかし当時若かったこともあり、後先を考えず‘韓国語を勉強したい’という強い思いを信じ、単身故郷の地を踏む決心をした。

そうして2015年、忠清南道の公州市に語学留学を学ぶために海を渡る。 忠清南道の公州市にある国際教育振興院では毎年在日同胞母国修学プログラムを、国立公州大学漢民族教育センターで実施されており、朝鮮半島にルーツのある世界各国の在外同胞が言語習得、大学進学準備のための言語取得を目的にしたプログラムが実施されている。

S氏もそこでまず7,8カ月のプログラムを受講した後は、一旦帰国するが、すでに大学を日本で卒業したこともあり生計を立てるために就職活動を行う。いろいろなタイミングが偶然にも重なり、済州島にある高校で第二外国語の日本語を教える日本語教師として第二の韓国生活を迎えることになる。


しかし、留学の時と違いいざ基盤を韓国に移しての生活は苦労の連続だった。

幼少期に韓国を学ぶ機会がなく、8カ月の語学研修では簡単な会話などはできるようになっても、生活をするにあたっての日常会話を完全に習得するのは大変困難である。また生活用品や食品などの名前もわからないものが多く、調べてから買い物にいくのが大変だった。

さらに、文化の違いや、日本以上に年上を敬って年下が真っ先に動かなければいけなかったり、お店で日本人の友達と日本語で話していると日本人ですかと、聞かれたり新しく知り合う韓国人の友達と知り合うと、「日本人」?と聞かれ、日本で生まれ育った在日韓国人だが、韓国語も拙いため、堂々と韓国人とは表現できないもどかしい気持ちがあったという。

この葛藤は在日同胞留学生達の大多数が、経験すると筆者は感じている。

最後に、話してくれた

「私達在日同胞にも様々なパターンがあると思います。両親のうち、一人が韓国人、片方が在日同胞、ルーツが朝鮮半島であるが帰化をして日本国籍のかたもいらっしゃいます。私は日本でも韓国でも韓国がルーツだということ意識せざる得ない場面がいくつもありましたが、私より下の世代の人達はどのようなのか気になっています。世代や時代によって、様々な考えを持っていると思いますが、日本で生まれ育ち、これからも日本で生活をしていく人たちがほとんどだと思います。韓国語が全くできない在日同胞の方もいらっしゃいますが、韓国語は是非勉強して、できるようになってもらいたいです。見える世界が変わっていきます。日本語で情報を得るだけではなく、韓国語で情報を得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り、日本のマスコミだけを信じるのはとても危険なことなんだと思うようになりました。また他の言語を学び、できるようになれば世界がもっと広がると思います。若い世代の子たちにはいろいろな経験をしてほしいです。」

我々祖国で生活している在日同胞3、4世の世代が、いろいろな経験を通じて次の世代に何かを伝えられる役割を全うし、それが1、2世の方々への恩返しになるのではないかと、筆者は強く感じそのために行動していきたいと思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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