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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우리말']나와 우리말

작성자 몽당연필
작성일 21-11-21 00:15 | 88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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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에게 우리말이란 무엇일까, 

우리말과 어떻게 만났을까, 

우리말은 어떤 뿌리를 갖고 있는가. 

‘나와 우리말’을 주제로 다양한 동포들의 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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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우리말을 배운다, 그렇기에 더욱 더

● 정성화(한글능력검정협회 이사장)


한글능력검정협회는 1992년에 한국‧조선어로는 세계 최초로 검정시험 운영단체로서 발족되었습니다. 당시 나는 고교생이었는데 할머니에게 “김치를 먹고 버스에 타면 일본사람이 싫어한다.”는 말을 들었던 시절입니다. 지금은 백화점 지하 식품매장에 김치가 진열되어 있고 거리에서 한글을 많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대의 변화를 느낍니다. 


이 협회는 3가지 이념을 내걸고 설립 당초부터 아카데믹한 운영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협회의 이념을 살펴보면 발기인이 재일코리안이기에 더욱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① 일본에서 한국‧조선어 보급에 힘을 쏟는다. 

② 남과 북, 양쪽의 맞춤법을 모두 인정하고 일본어를 모어로 하는 화자의 ‘한글’학습 성과에 정확한 사회적 평가를 부여한다. 

③ 남북의 맞춤법을 통일하는데 공헌한다. 


재일동포의 ‘우리말’에 대한 관점은 현재 자신이 획득한 언어를 중심으로 다양화 된 시대로 한창 이행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국의 언어를 보면, 북쪽은 평양 문화어, 남쪽은 서울 표준어가 바탕이 된 동일한 언어지만 억양이나 표현이 일부 다릅니다. 그리고 우리 재일동포가 쓰는 말은 일본어의 간섭을 받은 ‘우리말’입니다. 


현재 남북의 언어학자들이 제작중인 <겨레말 대사전>에서는 재일동포가 쓰는 말을 ‘방언’으로 규정해 게재하려고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흔히 ‘한(韓)글’에 속한 ‘조선(朝鮮)글’이라 ‘한글은 한국의 말’ ‘조선글은 공화국의 말’이라는 해석이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중에 덧붙여진 부연입니다. ‘한글’이란 ‘큰, 위대한 문자’를 의미하고 ‘한국어도 조선어도 한글을 이용해 쓰여진다’는 것이 올바른 해석입니다. 영어의 알파벳에 해당하는 말처럼 ‘한글어’라는 표현은 엄밀하게 없는 언어입니다. 


저는 3세인데 일본에서 자라는 코리안의 자손들은 무엇보다 정확한 우리말을 써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린 시절에 자주 들었던 ‘너들’이라는 말, 정확하게는 ‘너희들’이지요. 이처럼 재일코리안의 일상에서는 통하지만 조국에서는 통하지 않는 말이 상당수 존재합니다. ‘~입니다네(ね)(~ですね)’도 마찬가지로 어미의 ‘네(ね)’는 분명한 일본어입니다. 재일동포 특유의 억양이나 ‘한국‧조선어에서 파생된 자이니치의 말’은 우리문화이긴 하지만 일본어와 우리말의 조어는 조국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기본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나중에는 혼동하게 됩니다. 일본에 살고, 조선어를 습득하는 장소가 있고, 한국어에 접하는 기회도 많은 우리들이기에 올바른 지식을 바탕으로 TPO(time, place, occasion)가 변별된 언어사용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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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능력검정협회가 만들고 있는 교재와 과거 문제집 일부 



<참고> 한글능력검정협회

1992년 10월 9일 ‘한글날’에 설립. 초대 이사장은 나가노현에 거주하는 재일조선인 1세 정무진(鄭武鎭)씨. 1999년에 특정비영리활동법인으로 도쿄도의 인가를 받음. 

「한글」검정의 한글은 ‘한국‧조선어’를 총괄하는 의미로 「 」로 묶어서 쓰고 있고 협회명은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 」는 없이 한글능력검정협회로 쓰고 있다. 

자격은 【초급→5급·4급, 중급→3급·준2급, 상급→2급·1급】의 6단계. 

일본 국내의 기업이나 대학에 널리 인지되어 있어서 강사, 여행, 무역, 번역 등의 분야에서 평가기준으로 삼는 곳이 다수. 누계 합격자 수는 약 46만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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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블로그, 인스타그램 QR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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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빠져들어 다시 배웠다

● 김수환(교토 우토로 마을)


공부를 싫어했던 나에게 우리말은 굉장히 어려운 존재였습니다. 조선대학교에 진학해 공부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지만 국어(조선어) 성적은 참담했는데, 특히 말하기 수업은 맹복실 선생님이 마지막까지 남아있게 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런 제가 우리말에 푹 빠져들게 된 계기는 재일본조선청년동맹(조청) 교토부 본부의 전임일꾼으로 활동을 시작한 당초부터 힘을 쏟은 청년학교였습니다. 


제가 담당한 야마시나(山科) 지역에서는 오랫동안 지부활동이 정체되어 있어서 지역의 동포청년들에게 지부를 다시 살려보자고 하려 해도 ‘야마시나에는 지부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분위기라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무아지경으로 활동하던 중 하기학교(summer school) 프로그램에 참여한 일본의 중‧고교에 다니는 코리안 학생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청년학교를 열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은 남성 전임일꾼이 강사를 하는 경우도 흔치 않았고, 또 제 자신도 우리말실력이 충분하지 않았는데 ‘우리말을 배우고 싶다, 민족에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싶다’는 일본학교 재학 중인 동포 학생의 기대를 눈앞에서 접하고 다시 우리말을 맹렬히 공부했습니다. 


청년학교가 지속적으로 운영됨으로써 지역의 동포청년들도 이 일을 돕겠다며 모이게 되었고 그때부터 지부의 재건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우리말을 배우고 동포청년들과 만난 일본학교에 다니는 동포학생들에게 “조선인인 나 자신이 점점 좋아진다.”는 한마디를 들었을 때의 감동과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재일본조선청년동맹(조청)에서 재일본조선총연합회(총련)으로 옮겨 조국방문사업을 하면서 공화국을 방문할 기회가 늘어났는데, 조국에서 만난 연배의 안내원이 말하는 원어민 발음에 매료되어 평양말을 필사적으로 따라하자 “그건 평안도 사투리입니다.”하며 저를 보고 웃었던 일도 추억입니다. 


그 후 우토로 마을에 있는 미나미야마시로(南山城) 지부에 배속되자 우토로 지역을 찾아오는 남쪽 사람들에게 우리말로 우토로를 해설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남쪽 사람들은 공화국 사람들처럼 재일동포가 쓰는 우리말을 ‘너그럽게’ 봐주지는 않아서 남쪽 사람들이 알아듣기 쉬운 우리말로 ‘설명해 드리기’ 위해서 남쪽의 억양을 구사할 수 있도록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우토로를 통해 남쪽 사람들에게 재일동포의 역사와 그곳에서 자라며 배운 민족교육의 훌륭함을 전하고 싶었고 우리말은 그런 바람을 실현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남쪽 사람들에게 “재일 3세가 왜 그렇게 우리말을 잘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언제나 “저는 조선학교에서 국어가 꼴찌였어요.”라고 대답합니다. 


조선학교가 가르쳐준 우리말이 저의 중심이자 동기부여이며 아이덴티티입니다. 

저는 현재도 지부에서 운영하는 토요일 아동교실에서 우리말 강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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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아동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김수환 씨
(월간이어 2012년 4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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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어(在日語)’를 발판으로

● 임수원(회사원)


한국에서 주로 광고아이템을 들여와 일본의 기업에 판매하는 일을 8년 정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한국 측의 담당자와는 당연히 우리말로 대화하지만 처음에는 한국인이 말하는 속도에 익숙해지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또 한국의 비즈니스용어 뿐만 아니라 인쇄에 관한 전문용어도 몰랐기 때문에 듣고 묻기를 반복하며 몸에 익혔습니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이 거듭되면서 말의 토대를 조선학교에서 체계적으로 배운 것이 절대적인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만 굳이 “당신에게 우리말은?”이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재일어(在日語)’―동포사회에서 계속 사용해 온―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한국 사람과 대화할 때 내가 하는 말은 ‘한국어’라고 느낍니다. 


‘재일어(在日語)’를 그대로 쓰면 북에도 남에도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남북의 사람들은 ‘재일어(在日語)’를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 또한 하나의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원래는 하나였던 말이 세 개로 나누어진 것은 일본의 식민지와 민족분단의 역사를 말해줍니다. 그러한 배경을 보더라도 ‘재일어(在日語)’는 저에게 있어 ‘우리말’이며 제 자신의 아이덴티티기도 합니다. 

‘재일어(在日語)’를 발판으로 삼고 원어민과 자연스럽게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말을 하나씩 배워 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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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받기도, 힘이 되어 주기도 

리루이(재일본조선청년동맹 치바현 본부)


조선과 일본, 양쪽의 뿌리를 가졌고 부모님이 지어준 일본이름으로 일본사회에서 자라온 나에게 동포사회와 연결된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은 재일본조선유학생동맹(유학동)과의 만남이었다. 


우리말이 당연한 것처럼 오가는 장소는 충격적이어서 일본인으로 살아온 나는 처음엔 당혹스럽고 가시방석 같은 느낌이었다. 


민족의식이 싹트는 과정에서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는 물음에 직면했다. 일본인사회와 동포사회 사이에서 일본/조선인을 구별 지어 행동할 수 있을 만큼 요령이 좋지 못했고 그런 식의 적당한 흉내도 낼 수 없었다. 또 당시의 나는 조선인으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말을 비롯한 민족적 소양이 내게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유학을 해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아버지의 존재도 영향이 있었던지 ‘우리말을 하지 못하는 문제’는 특히 커다란 콤플렉스였다. 


우리말을 둘러싸고 상처를 받은 경험은 많았다. 예를 들어 공화국이나 한국 사람들과 만날 때 통역을 거쳐야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왜 하필 지배자의 언어로 조선말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가―억울하고 한심했다. 나를 우리말과 갈라놓은 일본사회에 화가 났다. 이런 고통을 과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경험했을까. 조선인이 조선말을 배우고, 조선인으로 살아가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 가능해지기까지 나는 조선인의 이름으로 살고 조선말을 ‘우리말’로서 배워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의 대학에서 제2언어로 ‘한국어’를 선택하고 한국유학 경험이 있는 일본인과 한국인 강사에게 한국식 말을 배웠다. 동정 받을 정도의 조선말밖에 익히지 못했던 나는 그 후에 진학한 조선대학교연구원에서 본격적으로 우리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일본어를 섞어가며 수업을 해주었지만 처음에는 30% 정도밖에 이해하지 못해서 요약문 가운데 모르는 우리말을 확인하는 작업만으로 하루가 끝나버린 적도 있다. 내가 선택한 길인데도 ‘왜 이렇게 힘든 고생을 해야만 하는지’ 화가 나서 울기도 했지만 조선어 자료를 만드느라 끙끙대던 나와 함께 밤이 새도록 곁에 있어 준 동무들이 정말 고마웠다. 끈기와 동무들 덕분에 6만자의 논문을 조선어로 완성하고 무사히 수료할 수 있었다. 


동포사회 속에서 동무들의 도움을 받아 배운 조선어.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의 우리말이다. 현재 조청(재일본조선청년동맹)의 전임활동가로 일하고 있지만 나의 우리말은 결코 유창하진 않다. 하지만 앞으로도 공부를 계속하면서 우리말을 배우고 싶어 하는 동포청년이나 학생들을 위해 노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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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조선대학교 편입생반(일본학교 출신)의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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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에 뒤지지 않는 조선어 교육 

● 조민혜(조선대학교연구원, 프랑스음악원 재적)


프랑스 유학중에 조선이나 한국 사람들과의 만남은 각별합니다. 그들과는 당연히 우리말로 대화하고 메일이나 편지 교환을 하는데 그때마다 예상하지 못한 격려의 말을 듣는 경우도 가끔 있습니다. 그것은 글씨가 정갈하고 정확하다는 칭찬이었습니다. 


저는 그다지 글씨를 예쁘게 쓰는 편은 아니지만 한국이나 조선에서 온 사람이 저의 글씨를 볼 때마다 “어디서 배웠는가, 왜 이렇게 글씨를 예쁘게 잘 쓰는가.” 하며 놀랐습니다. 음악원에서 연습실을 빌릴 때 무심코 쓴 우리말 서명이 곱다고 유학생들 가운데 화제가 된 것 같습니다.(웃음)


또 몽당연필 분과 만났을 때는 ‘띄어쓰기와 맞춤법이 정확해서 당신과 메일을 주고받을 때마다 긴장한다. 한국의 젊은이들보다도 분명하고 올바른 글자를 쓴다.’며 조선학교의 조선말 교육에 감동했습니다. 


이전까지는 일본에서 배운 조선말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모어가 아닌 언어를 모국어로서 배워야 하기 때문에 더욱 더 쓰는 순서, 맞춤법 등을 기초부터 제대로 가르쳐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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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아요, '동포말' 

● 고창홍(한국어 강사)


“재일동포가 쓰는 우리말, 어색하고 부자연스럽지 않습니까?”

일본 거주 13년차인 내가 재일동포 여러분들에게 자주 듣는 질문입니다. 운영하고 있는 YouTube채널 <일본아재 TV>에 재일동포 여러분의 동영상을 업로드하면 ‘북한말 같다’ ‘<우리말>이라 하지 말고 북한어라고 부르는 편이 좋다’ 같은 댓글을 다는 한국동포도 적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학교(조선학교)에 다니고 있는 저의 큰딸이 평소에 쓰는 단어 중에는 ‘위생실(화장실)’ ‘필갑(필통)’ ‘소조(동아리)’ ‘롱구(농구)’ ‘원족(소풍)’처럼 한국에서는 쓰지 않는 단어도 있습니다. 그래서 ‘북한말’처럼 들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일본어의 영향도 상당히 크다고 생각합니다. 재일동포의 우리말을 들으면 재일조선인 특유의 악센트나 억양을 느끼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문법적인 측면에서 보아도 예를 들면 ‘숙제하지 않고 있습니다’(숙제 안 했습니다) 같은 표현은 일본어를 우리말로 직역한 것이기 때문에 일본어의 영향이라 할 수 있겠지요. 또 ‘할머니’를 ‘함메’ ‘(값이)싸다’를 ‘헐하다’로 표현하는 것을 보면 한국의 방언이 영향을 미친 부분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러한 재일동포의 ‘우리말’이 정말 좋습니다. 재일동포의 우리말을 들으면 수많은 어려움과 차별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계승해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당신들과 똑같은 조선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말’의 정의는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1980년대, 90년대의 서울말과 현재의 서울말은 분명히 다릅니다. 지역마다 쓰고 있는 말에는 차이가 있고 같은 지방에 사는 사람이라도 개개인이 쓰는 말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재일동포 여러분이 쓰는 우리말을 조선반도의 각 지방에서 쓰이고 있는 말과 전혀 다름없는 방언의 하나로서 위치부여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동포말(재일동포語)’에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랄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경위, 동포의 99%가 현재 한국에 해당하는 남쪽 출신이지만 북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진 우리학교에서 민족의 말과 문화를 배우게 된 이유, 아이들이 조선인으로서 아이덴티티를 키워갈 수 있게 해준 1세, 2세의 피와 땀이 스며든 노력 등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동포말’은 결코 이상한 우리말이 아닌 굉장히 귀중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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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글은 <月刊イオ>(월간이어) 2021년 10월 호의 기사를 번역한 것입니다. 

번역 : 몽당연필 번역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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