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

동포소식

[특집 '우리말']추억이 담긴 고향말

작성자 몽당연필
작성일 21-11-21 00:01 | 88 | 0

본문

c56ccfc254b2bc4b4409ead810cc1203_1637419878_5808.png
 

한반도에서 나고 자라 일본으로 건너온 자이니치 1세에게 들었던 고향말. 2,3세가 기억하는 고향말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1. 경상도


휴가 기간 동안 야마구치현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댁에 머물면서 토종 경상도 사투리를 듣게 되었다.

빨빨대며 돌아다니던 나를 외할머니는 ‘싱개비’라고 불렀다. ‘이 손주놈’ 이라는 뜻인 줄 알았지마 틀렸던 모양이다(웃음).

‘짠 맛이 모자라다’는 뜻의 ‘싱겁다’는 ‘하는 짓이나 하는 말에 재미가 없다’는 의미로 ‘싱거운 사람’ 꼴로도 쓰인다. ‘싱개비’는 ‘싱겁+이’, 즉 싱거운 짓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사투리였던 것 같다.

참고로 불혹을 맞은 지금도 나는 어머니에게 ‘싱개비’라고 불린다.


- 김OO (3세, 47, 사이타마)

c56ccfc254b2bc4b4409ead810cc1203_1637419944_7874.png 


함께 살던 할머니(1세)는 친척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끔 평소에는 일본어를 썼지만, 흥분했을 때는 불같은 조선말이 튀어나왔다. “또 지 랄한다!” 나는 3자매였기 때문에 ‘가시나’라고 많이 불렸고 ‘무시마’는 거의 들을 기회가 없었다. 

- 박OO(3세, 52, 도쿄)


할머니가 쓰던 말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세가지다. “잘 댕겨요?”,”뭐하노?”, ”뭐라카노?”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내 고향은 겡상남도입니다.”

- 김OO(2세, 52, 오사카)


할머니의 경상도 사투리는 박력이 넘쳤다. ‘느그 엄마는’ 라는 말을 들으면 어느 엄마를 말하는 걸까 순간 생각한다.

입원해있을 때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백화점 식품코너에서 반찬을 사서 병문안을 오셨다. “나나 묵그라”, “갈라 묵그라”라길래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같은 방 사람들과 나눠먹으라는 뜻이었다.

‘아이고 무시라’ 거나 ‘퍼뜩퍼뜩’은 나도 입버릇처럼 많이 쓰게 되었는데, 이건 분명 할머니의 영향이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밥 무었나?’며 물었을 때 어린 나는 ‘응 먹었어’라며 시큰둥하게 대답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따뜻한 말이 또 있을까 생각이 든다.

- 김OO(2세, 53, 도쿄)


2. 함경도 

"자부럽다. 가 자라"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어느새 21년. 산전수전 모두 겪은 1세 조련 활동가였던 아버지는 집에서는 물론 우리말로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매일 아침 <평양방송>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았다. 매번 그 소리에 잠을 깼다. 그래서일까, 나에게 아버지의 함경도말은 곧 <평양방송>의 말이었다. 그중 한가지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함경도말이 있다.

“자부럽다. 가 자라(졸린다. 가서 자라)”

“아버지, 지금 뭐라고 한거야?…”

돌이켜보면 4형제 중 막내에다 자기 책상도 없었던 나는 시험 전에는 주로 아버지 방에서 공부를 했다. 공부하다보면 어느샌가 아버지 이불에서 잠이 들었다. 그때 “자부럽다. 가 자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아버지의 말과 베개에 스민 포마드 냄새가 지금도 그립다.


- 효OO(2세, 54, 도쿄)

c56ccfc254b2bc4b4409ead810cc1203_1637420167_1397.png 


3. 전라도

"이 쪼매만한 아가 언제 죽을란디"

전라도 출신의 할머니는 가까스로 9명의 자식을 키워낸 것도 모자라 손주인 우리 자매까지 돌보게 되었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당시 살던 집에는 독신이었던 삼촌도 같이 살고 있어서 집은 거의 전쟁터 같았다. 거기에 다리가 안좋았던 나와 병약한 언니까지 돌봐야했으니. 특히 언니를 보며 “이 쪼매만한 아가 언제 죽을란디”라며 매일 걱정하셨다. 우리가 커가면서 할머니 말을 안듣고 대들면 “이늠 가시나야 두드러팬데이!”라며 손이 날아왔다. 어떤 말보다도 마음에 남는, 애정이 담긴 사투리였다.

- 김OO(3세, 54, 오사카)

c56ccfc254b2bc4b4409ead810cc1203_1637420200_787.png 


4. 평양

할아버지는 동물을 좋아하는 걸까?

16살까지 평양에서 자란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날 무렵에는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양 방언이나 말씨를 직접 들은 기억은 없지만 “그래”를 “기래”라고 말하거나, ‘ㅈ’을 ‘ㄷ’으로 발음하거나(자전거를 다던거)라고 하는 등 말투 곳곳에 남아있던 특징들이 생각난다.

내 이름은 할아버지가 지어줬는데, 내 이름인 “조리”를 평양 사투리로 “도리(일본어로 토리(トリ))”라고 읽기 때문에 “이름이 토리(일본어로 ‘새’라는 뜻)라니…” 라며 엄마가 속상해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참고로 나의 또다른 이름 후보는 ‘덕희(일본어로 토끼(トッキ)라고 읽음)’였다. “이름을 토끼로 짓다니, 새와 토끼 중에서 고르라는 할아버지는 동물이 그렇게 좋으신걸까”라며 우리 가족 안에서 논란이 되었다나 뭐라나.


- 김조리(3세, 40, 도쿄)

c56ccfc254b2bc4b4409ead810cc1203_1637420306_7173.png


5. 서울

"살아서 살곳 없고 죽어서 묻힐 땅이 없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서울 출신이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 일본으로 유학을 왔다. 유치원부터 초급부 저학년 시기까지 함께 사는 동안 할아버지는 내내 우리말로 말했다. 어렸던 나는 자주 혼났던 기억이 난다.

“되지 못할 계집애가 까불고 자빠졌다”. 나를 혼낼 때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이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에 건너왔기 때문에 죽고 나서 무덤은 고향인 서울에, 아니 평양에. “살아서 살곳 없고 죽어서 묻힐 땅이 없다”. 이것이 재일동포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올해로 20년이 지났다. 기억들을 되돌아보면 그런 말들이 머리에 떠오른다.

- 윤OO(3세, 30, 아이치)

c56ccfc254b2bc4b4409ead810cc1203_1637420340_2301.png


6. 경기도

눈에 보이는 것 같은 모음

아버지는 경기도에서 태어났지만 강원도 속초에 산 적도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사투리를 쓰지 않았다. 아버지가의 발음은 모음이 눈에 보일 것처럼 유려했다. 

성격이 온화하셔서 화를 내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우리 자매가 일본어를 쓰는 순간 불같이 화를 내셨다.

조선대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쳤던 아버지는 조선어 읽기 숙제를 잘 봐주셨는데 발음을 틀릴 때면 캐스터네츠를 딱 하고 치며 알려주었다. 쓰기 숙제는 문장을 소리내서 읽으면서 봐주셨는데 왠지 연극 톤으로 읽곤 하셨다. 그게 그렇게 웃겨서 자주 흉내내곤 했다.

나는 아버지가 쓰는 우리말이 좋았다. 아버지의 고향말은 아직 가보지 못한 고향과 나를 이어준 ‘고향의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 윤OO(3세, 30, 아이치)


7. 제주도

"우리 나몽새끼"

직역하면 내 말의 새끼, ‘예쁘고 또 예쁜, 우리 아이’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자주 쓰시던 제주말이다.

친가 외가 할머니 모두 요리를 잘하셨고서 할아버지가 만드는 김치도 예술이었다. 제사상이나 밥상에는 해산물을 많이 올렸고, 할머니가 자라의 피를 마시는 걸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우뭇가사리로 묵을 만들어 주셨던 것도 기억난다. 생선도 뼈까지 깔끔하게 드셨다.

부모님이 신발 공장을 신경쓰느라 바빠서 할아버지 할머니는 우리가 유치원 높은반에 다닐 때까지 오사카에서 함께 살아주셨다. 할아버지는 옛날 분이셨기 때문에 장손인 나를 각별히 아껴주셨고 학교 수업참관에도 매번 와주셨다. 조그마한 도미를 정말 좋아해서 고향의 바다에서 이것저것 낚시하는 걸 정말 좋아하셨던 것 같다.

- 윤OO(3세, 44, 효고)

c56ccfc254b2bc4b4409ead810cc1203_1637420489_9047.png
 


해당 글은 <月刊イオ>(월간이어) 2021년 10월 호의 기사를 번역한 것입니다. 

번역 : 몽당연필 번역팀
법률상담 문의하기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