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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을 응시하며] 또 하나의 민주화투쟁 - 예수를 의지해 살다

작성자 몽당연필
작성일 21-11-20 23:39 | 98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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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철

1948년 일본 구마모토현 출생. 1972년 주오(中央)대학 졸업. 1975년 12월, 고려대학교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재학 중에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날조된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으로 투옥, 사형판결을 받은 후 13년간 복역생활을 하고 1988년 10월에 출소. 1990년 <재일한국양심수동우회>를 만들고 대표를 맡았다. 2015년 11월에 재심을 청구해 무죄판결이 확정. 2018년 12월, 제3회 <민주주의자 김근태상>(양심수동우회)을 수상. 2020년부터 <우리민주연합>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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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지고 깨진 나를 다시 되찾자. 그러려면 중앙정보부(KCIA) 무리들이 ‘이철을 감옥에 넣은 것은 실수였다. 감옥에서 더 큰 인간이 되어 나왔다. 이건 실패다.’라고 말하게 만들어야 된다고 결심했지요.”

이철(李哲). 그는 1975년, 유학 중이던 한국에서 ‘북의 간첩’으로 날조되어 사형수가 된 인물이다.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1988년이 되어서야 석방되었다. 이듬해에 일본으로 돌아왔고, 2015년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고 2019년 문재인대통령에게 직접 사과를 받았다. 올해 6월, 그의 반생을 「長東日誌 在日韓國人政治犯 李哲の 獄中記(장동일지 재일한국인 정치범 이철의 옥중기)_일본어판 東方出版」에 담아냈다. 자유와 평등을 희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내민 ‘바통’이다.


1948년, 재일 2세로 구마모토현 구마군(球磨郡)의 민단계 인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주오(中央)대학에서 동포단체 활동에 참여하면서 일본이름을 버렸다. 민족성을 되찾고, 한국인으로서 주체를 되찾아 민주화에도 공헌하고 싶었다. 점점 더 커지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길은 당시로선 몇 곳이 안 되는 민족학교에 가거나 ‘유학’이었다. 

서울의 고려대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어느 날 이른 아침에 중앙정보부(KCIA) 사람들이 하숙집으로 찾아왔다. 눈을 가리고 납치된 곳은 민주화 탄압의 상징인 남산(KCIA 본부)이었다.

폭행과 심문, 지하실에서의 고문이 계속되었고 친구와 지인도 연행되었다. 그들은 이철 씨의 약혼자 민향숙 씨와 그녀의 어머니인 조만조 씨를 이씨가 보는 앞에서 범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놈들은 실제로 그렇게 할 인간들입니다. 너무 무서워서 ‘그것만은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39일 만에 완전히 굴복하고 말았다. 북에서 간첩지령을 받았다는 ‘시나리오’를 시인하고 재판에서도 인정했다. 검사는 이씨에게 ‘사회로부터 영원히 말살시켜야 한다.’고 매도하며 사형을 구형, 판결 또한 극형이었다. 게다가 ‘자백’의 결과 약혼자 민향숙 씨까지도 공범으로 몰려 3년 6개월의 실형을 받았다. 자기 확립을 위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태어난 땅에 건너온 청년에게 ‘조국’이 가한 처사였다.


하지만 그때부터 그는 부서지고 망가진 마음을 되찾아 간다. ‘다시 살아보기’를 결의하게 만든 이는 구마모토에서 면회를 와 저항하기를 포기한 아들을 꾸짖으며 맞서 싸우라고 다그친 그의 어머니다. 이씨의 무고함을 굳게 믿고 일본과 한국을 오가는 면회를 거듭하며 다양한 곳에 무죄를 호소한 동급생과 지원회 사람들. 무엇보다 끝까지 자신을 신뢰하고 지지한 민향숙 씨와 그녀의 어머니 조만조 씨의 존재가 컸다.

그리고 그를 지탱해준 또 다른 기둥은 신앙이었다. ‘배움’을 빼앗긴 유학생의 ‘갈증’을 보다 못한 한 죄수가 마르코 복음서를 감방에 몰래 넣어준 것이다. “너무 힘들면 이것이라도 읽으라고 절도범인 일반 죄수가 내게 건넸습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천사’였습니다. 처음엔 카톨릭 신자였던 조만조 어머니에게 보답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읽어보려 했는데 어느새 무아지경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충격을 받은 것은 예수의 삶이었다. “가난한 사람, 어려운 상황에 놓인 민중들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분. 바로 나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이었고, 그 일로 인해 사형을 당합니다. 2000년 전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니. 오만하지만 예수님을 ‘형님’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공감을 한 것이지 신앙은 아니었다고 거듭 말하며 이철 씨는 웃었지만 나는 생각했다. 그와 같이 예수의 삶을 살려는 이들을 신앙인이라 한다고.

“나는 두 번 다시 굴복하지 않는다.” 그 결심을 관철시킨 일이 <대구교도소 7·31 사건>이다. 당시 한국에서 가장 험한 감옥으로 악명 높았던 대구교도소에서 동료들과 처우개선 투쟁에 나섰고 독재정권의 폭력장치였던 교도소에서 단식만을 무기삼아 커다란 성과를 얻어 낸 것이다.


때는 1985년, 광주민중항쟁으로부터 5년, 박정희 정권 이상으로 학생, 노동운동이 억압당했고 대형 언론사들이 차례로 전두환 정권의 ‘시녀’가 되어가던 시대이다. 옥중투쟁은 침체상황에 있던 민주화운동에 불을 붙인 기폭제였다.

석방된 후에는 일본으로 돌아왔다. 곧바로 다시 한국에 가고 싶었지만 여권발급을 거부당했다. 게다가 한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신변위험에 관한 정보들뿐이었다. 재방문이 실현된 것은 김대중 정권 시절인 2001년으로 석방 이후 13년이 지난 때였다.

수기 글은 자신의 두 아이를 생각하며 쓰기 시작했다. 전기공사 현장을 오가는 전철 안이나 점심식사 후 2~30분 동안 글을 썼는데 분량이 대학노트 7권에 달했다.  개인적인 책으로 만들 생각이었지만 수기를 읽은 지인들이 출판을 권했다. 지원자들에게 옥중에서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고도 싶었고, 한국의 민주화를 더욱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되고 싶은 바람도 있었다. 더불어 ‘재일동포 젊은이들에게 나와 같은 존재를 알게 하고, 남북화해나 통일, 조국에 공헌하는 일에 대해 고민해 주기를 바라는’ 생각도 점점 커져서 간행을 결심했다.

수기에는 감옥에서의 여러 투쟁은 물론이며 그곳에서 만난 죄수들의 모습이 가득하다. 민주화, 통일운동의 주역뿐 아니라 일반범죄로 사형을 받은 사형수도 동일한 생명으로 그려진다. 이름도 없이 사형된 사람들의 삶을 새기며 추모하는 자세에서 그의 인간미가 베어 나온다.

‘투쟁경력’으로 보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유화한 말씨와 태도. 이철 씨는 그야말로 모두에서 언급한 맹세를 실현시킨 것이다. 그 ‘힘’의 근원은 어디서 왔을까. 그는 말했다. “지하실에서 보낸 39일 동안 나 자신에 대한 좌절감, 무력함, 비열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 나약함을 직접 겪었으니까… 두 번 다시 그런 감정을 맛보고 싶지 않고 배신하고 싶지 않습니다.”


● 글 - 나카무라 일성(中村一成): 마이니치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는 프리 저널리스트「르포 교토조선학교 습격사건」 저자  


해당 글은 <月刊イオ>(월간이어) 2021년 10월 호의 기사를 번역한 것입니다. 

번역 : 몽당연필 번역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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